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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와 선 그 사이에서,

경계와 선 그 사이에서,



 ‘가치 판단’으로부터 무뎌지는 것. 무비판적인 수용과 아무런 본질도 수용되지 않은 반응, 그것들에 관해. ‘가치 판단’이 가장 쉽게 배제되어지는 우리들의 약속, 도덕성과 윤리의 영역들, 이미 정해 놓았던 ‘절대 가치’ 앞에 나의 주권과 가치는 너무도 쉽게 상실에 이르고 만다.



 ‘절대 가치’ 앞에 모습을 감추어버린, 작은 주권과 가치들. 그 상실 속에 깃든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적대적인 것들에 나의 주관적 해석이 첨가되는 경우에는 오로지 한 가지의 이유가 존재한다. ‘합리화’, 이 녀석을 통해 나의 죄의식으로부터 또 죄책감으로부터 정당성을 얻고 싶을 때. 절대의 경계에 침범한 나의 몹쓸 욕망과 본능은 이해받아 마땅하지만 결코 허용되어서는 아니 될 것들이다. 



 나도 공감하지 못하는 심연에 깊이 가라앉은 또 다른 ‘나’의 모습이 지면 위로 고개를 슬쩍 내밀 때면, 나의 마음속은 이미 이해받지 못할 두려움과 그렇기에 느낄 수 있는 묘한 쾌감이 공존된 상태로써 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침범해버린 절대의 경계, 그 경계는 어리숙한 나의 합리화에 의해 갈수록 더 굵어진다.


 그렇게 ‘경계’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만다. 하지만, ‘절대적 경계’, 그 경계를 꾸준히 지켜온 이들에 대한 멋스러움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실, 경계의 기준과 의미, 목적을 구실 삼아 잘도 넘나들던 ‘나’의 모습은 그저 나약하기만 하다. 사실 ‘약속’ 아니 사회적 규범 혹은 도덕성과 윤리에 내가 무너지고 패할 때마다 나의 본능과 이기심, 탐욕스러움이 그들을 대적해 이길 때마다 그 죄책감을 감싸준 한낱 도구에 불과했던, ‘합리화’. ‘기준’은 또 ‘경계’는 그 축을 바꾸면 그때에 의미와 본질이 상실되어 버리고 만다. 그 끝에 남는 건 오로지 나의 영악함만이 존중받게 되어진다.



 내가 아니 나도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의 ‘나’. ‘나’는 이런 ‘나’의 모습마저도 지탱하지 못하면서 너무 쉽게 다른 의미들을 바꾸려 한다.



 이렇게 이기적인 모습을 하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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